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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과 자유의실천

학습/1st.영성 2011/01/25 10:52 Posted by 건성
모든 개인의 삶은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 있지 않은가. 회화나 건축이 미술품인데, 어째서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 ― 미셸 푸코

작년(2010년)에 우리는 우리시대의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 두 사람을 잃었다. 한사람은 1월에 강연여행 중 숨을 거둔 미국의 역사가 하워드 진, 또 한사람은 12월에 이 세상을 떠난 한국의 언론인이자 학자였던 리영희.

두 사람은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각자의 주어진 사회적·개인적 현실에 대응하며 살았으나 그들의 생애가 그려 보여주는 궤적에는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매우 흡사한 정신적 경향, 세계인식, 삶의 자세가 드러나 있다. 그러한 공통성은 동시대인이었기에 물론 가능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지식인의 본분에 극히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사람은 미국이라는 패권국가의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또 한사람은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아온 동아시아 분단국가의 가난한 지식인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지적·실천적 삶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차이였을 뿐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두 지식인의 삶에는 온갖 개인적 역경과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에서 오랫동안 축적되고, 전승되어온 보편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선양하기 위한 일관된 노력의 자취가 역력히 드러난다. 지식인이란, 간단히 말하면, 보편적인 인간가치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성은 결국 ‘진실’을 외면하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지식인의 일차적인 과업은 가능한 한 철저히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동시대인들과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이 이 과업을 방기할 때, 그가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이 지켜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식인 자신의 개인적인 삶도 심히 허망하고 누추해지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



좀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하여
《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알려져 있는 하워드 진은 뉴욕 빈민가의 유태인 이민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책 한권, 잡지 하나도 구경할 수 없었던 가난한 집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문학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성장했고, 청년기에는 2차대전에 참전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유럽전선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다음에 그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전쟁 중에 자신이 네이팜을 포함한 폭탄을 투하했던 지역을 찾아가보았다. 그때 그는 미군당국이 발표했던 것과는 달리 네이팜탄 투하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또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 인구가 밀집된 도시들에 대하여 자행된 무자비한 공습이 대부분 실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군부 지휘관들의 개인적 출세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무고한 인명을 학살하고도 정부와 군부는 언제나 ‘불가피한 사고’ 혹은 ‘부수적 손상’이라는 용어를 태연히 쓰면서 진실을 호도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 발견으로 ‘국가’에 대한 그의 순진한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옛 유럽전선 재방(再訪) 경험은 확실히 하워드 진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타고난 자질 탓이기도 했겠지만, 정의에 대한 그의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끝없는 동정적 관심의 뿌리에는 전쟁 중에, 비록 군(軍)의 명령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그가 저지른 살상행위에 대한 쓰라린 죄책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후 하워드 진의 일생은 평생에 걸쳐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었다. 1960년대부터 흑인사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민권운동, 여성 및 소수자 인권운동을 위시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운동에 뛰어들었고,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서는 최전선에 서서 미국의 전쟁범죄를 끊임없이 규탄했다.

베트남전쟁 동안에는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하노이를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확인한 다음에, 《철병(撤兵)의 논리》(1967)라는 책을 써서 베트남에서 왜 미군이 즉각적으로 물러나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보기에 베트남전쟁은 미국에 의한 침략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국정부의 논리는 패권주의적 지배를 은폐하는 기만적인 언어일 뿐이었다. 촘스키의 기억에 의하면,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기본적으로 범죄적이며 따라서 미군은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소리 높이, 공개적으로, 설득력있게” 발언한 최초의 미국 지식인이 하워드 진이었다.

물론, 국가에 의한 전쟁수행을 규탄했다고 해서, 한국의 리영희가 감옥으로 가야 했듯이, 하워드 진이 감옥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사회가 기본적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군사독재 치하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워드 진의 행동이 쉽게 용납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훨씬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미 이 무렵부터 FBI는 그에 대한 파일을 작성하여 “국가안보에 대한 큰 위험요소”로 분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사회도 그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촘스키는 하워드 진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철병의 논리》가 출판되어 나왔던 당시에 이 책에 대한 단 한편의 리뷰도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하워드 진의 단호한 메시지가 지식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늘 독자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쩌면 일반 시민들보다도 더 국가가 만들어낸 신화(神話)나 ‘국익’이라는 상투적인 관념 속에 안주하는 편을 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영희나 하워드 진은 결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외신기자 리영희가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냉전시대의 폐색상황이 강요하는 지적 불구화와 사상적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적인 고투였고, 그 덕분에 한국사회는 적어도 정신적인 호흡정지 상태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영희는 자주 그가 바라는 것이 단지 “상식이 통하고, 최소한의 도덕성이 통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사회가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불려도 좋고, ‘인간적인 사회주의’로 불려도 좋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결코 도식적인 도그마에 매달려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하워드 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하였으나, 그가 믿는 사회주의란 “소련에 의해서 그 이름이 오염되기 이전의” 사회주의였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좀더 친절하고, 좀더 부드러운” 사회를 뜻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주의사회란 사람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사회, 기업의 이윤이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생산을 하는 경제시스템”이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이 생애 마지막 무렵에 행한 발언도 매우 유사한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리영희는 거의 최후의 공식 인터뷰에서 자신이 평생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진실’이었으며,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서 언제나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하워드 진 역시 자신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느낌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말할 것도 없이, 그 희망은 ‘진실’의 힘에 의해 발효되고 배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식인이 진실을 정직하게, 용기있게 말한다는 것은 그 지식인 개인의 삶을 위엄있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희망의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데 무엇보다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지식인이 자기의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지식인
리영희나 하워드 진과 같은 지식인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간절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그들이 보여준 강인한 정신과 양심적인 행동을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금 나라 안팎의 상황은 한마디로 벼랑끝이다. 세계는 인류 전체가 합심하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고, 우리사회는 민주주의가 어이없이 망가지고 있다. 국가권력은 단지 선거에 의해서 집권했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자기정당성의 근거로 삼은 채, 시민들의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고, 국가기구를 철저히 사익 추구 수단으로 전락시키면서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 원리인 삼권분립마저 사실상 무력화시켜버렸다. 그 결과 이 사회는 지금 행정부 수장의 권력만 활개를 칠 뿐, 독립적인 입법, 사법이 존재하지 않는 흡사 식민지사회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이 정부는 연평도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지난 이십년간 애써 구축해온 남북간 화해·협력을 기조로 한 평화구조를 관리하는 데 극히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상심하고, 무력감 내지는 좌절감에 시달리며, 심지어는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쟁취한 민주주의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질 수 있느냐며 분노와 슬픔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 이러한 무력감, 좌절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나라 민주주의가 심각히 손상돼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전부 예외없이 민주주의가 회복돼야만 제대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나라의 현재와 장래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4대강 보호문제와 남북간 화해·협력체제의 재구축이 그렇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현재의 집권세력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권력남용이 상당수 국민의 동조 내지는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사회에서 대중의 지적 수준이나 정치적 교양에 관련하여 궁극적인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학자, 전문가, 언론인, 즉 지식인들이 결국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4대강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해온 소수의 학자, 전문가들의 노고를 잊을 수는 없다. 사실 이들의 양심적이고 성실한 노력 덕분에 그나마 종교계, 시민운동가, 일반 시민들이 정부에 4대강 공사의 중단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빠른 속도로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이 결국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반대의견을 학계의 극히 일부 의견일 뿐이라고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학자·전문가치고 4대강 공사의 무모성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말은 안하고 있지만, 멀쩡한 강이 단순한 수로(水路)로 변형되고 있는 이 사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토목·수문학을 비롯하여 관련학계가 전부 나서서 발언할 필요가 있다. 개인 자격으로, 또 학회의 이름으로 나서서 이 공사의 부당성을 “소리 높이, 공개적으로, 설득력있게” 말해야 한다. 공학자만이 아니라 물리학자, 생물학자, 법학자, 정치학자, 인문학자들이 모두 나서서,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공사는 나라 전체에 크나큰 재앙을 불러올 어리석은 만행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용기있게 발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학자, 전문가들이 말한다고 해서 귀담아 들을 권력이 아니다. 그리고 일찍이 촘스키가 말했듯이 “억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진실을 말해준다는 것은 시간낭비이며 무익한 노력”일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들을 마음이 없는 귀에 무슨 말을 한들 들어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발언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 발언에 의해 권력자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워드 진이나 리영희가 개인적 삶을 희생하면서 ‘진실’을 끈질기게 천착한 것은 그것이 권력의 자기반성을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국가권력의 남용에 의해서 우리사회에 합리적 의사소통의 공간이 극도로 위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4대강 문제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얘기지만, 4대강 공사는 대운하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 최소한의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적인 의문에 대하여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을 일절 거부한 채, 정부는 수질개선과 홍수방지라는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말만 되뇌며 서둘러 강과 유역생태계를 파괴하는 데 열중해 있다. 대체 강바닥을 다 파헤쳐놓고, 모래톱과 여울과 수변생태계를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수질정화의 자연적 기능을 온통 망가뜨려놓은 다음에 어떻게 수질이 개선된다는 것인가. 국민 전부를 바보로 여기지 않는다면 감히 할 수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사라지는 농경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랜 세월 강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강변 둔치는 옥토 중의 옥토이다. 그 둔치들이 지금 무참히 잘려나가고 있다. 또한, 수많은 농지가 준설토 적치장으로 변하면서 농지로서의 기능상실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도 못 볼 노릇이다. 정부가 예상하는 대로 몇년 후에 과연 이 농지들이 농지로서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실은 매우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이라는 아마도 급조한 것이 분명한 이름으로 정부는 농지를 훼손하는 일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우리나라는 자원빈국이라는 상투적인 말은 따져보면 극히 어리석은 말이다. 자원이 없기는커녕, 우리나라야말로 원래 좋은 기후, 비옥한 땅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생존·생활조건이 갖추어진 천혜의 자원부국이다. 자원이 없다는 것은 예컨대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지만, 석유시대는 지금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농사도 석유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 구조가 걱정이지만, 어떻든 이 구조는 바뀌어야 할 것이지 언제까지나 석유를 믿고 그대로 둘 수는 없는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탈석유시대를 대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땅을 최대한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석유시대가 종말을 고하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경제가치가 없다고 무시했던 우리의 논밭 하나하나는 그 어떤 유전(油田)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러나 정부 사람들이 사태의 진상을 모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이 합리적인 설명을 끝끝내 거부하는 것은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지식인들은 시민들을 위해서 발언할 필요가 있다. 지금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합리적 의사소통 공간의 재생을 위해서 지식인들의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은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민주주의의 소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에서 민주주의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회복 없이는 4대강을 보호한다는 것도, 남북간 화해·협력체제 구축을 통해서 평화구조를 확립한다는 것도 사실상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자유의 실천, 자기배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더 많은 지식인들에 의한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을 기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최근에 출판된 책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를 읽어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천안함 침몰사건에 관련하여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내용에 드러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온 재미 물리학자 이승헌 교수가 쓴 일기체 기록이다. 그는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 시초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거의 매일 꼼꼼히 기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매우 귀중한 역사적 증언을 남겨놓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 한국의 과학자들이 대부분 과학연구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별로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국가나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과학을 단지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간다운 삶에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을 보호하는 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들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모략이 아니다.

이승헌 교수의 책에는 천안함 ‘피격’의 증거로 정부 측이 제시한 결정적 자료, 즉 ‘1번 표시 어뢰추진체’의 신빙성 여부를 밝히는 과학적 검토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동시에 거기에는 과학계의 동료, 선후배, 스승들에게 이 작업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는 이승헌 교수의 간절한 호소가 담겨있고, 또한 그 호소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과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한결같이 동참불가라는 것이다. 끝내 답변을 주지 않고 침묵을 고집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이승헌의 실험결과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두려워서”, “해봐야 소용없을 것이기 때문에” 참여를 하지 않겠다는 답변인 것이다.

이러한 과학자들이 빠져있는 가장 큰 함정은 역시 국익이라는 관념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진실보다는 국익이 우선이라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침묵이나 회피가 결과적으로는 ‘국익논리’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기는, 안락한 연구실 환경에 익숙한 오늘의 학자, 전문가들이 이런 성가신 일에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이 범인이라는 정부와 극우언론의 ‘결론’을 거스를지도 모를 일에 개입한다고 생각하면 사실 불안할 것이다. 게다가 연구비 생각을 하면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승헌 교수와 그의 몇몇 동지들이 문제의 ‘1번 어뢰추진체’가 결국은 출처불명의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용기있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해외 거주 과학자들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물론 해외 거주 과학자라고 해서 모두 과학적 양심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오늘의 현실에서 예외적인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실력있는 전문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승헌은 그의 일기 속에서 극히 부실한 증거를 가지고 국제사회를 설득하려 한 정부의 무모함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감추어야 할 치부를 갖게 된 한국정부가 앞으로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경제적·도덕적 손실을 끼칠 것인가”라고 탄식한다. 이러한 고뇌는 정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고결한 인간이 아니면 기대할 수 없다. 상투적인 국익논리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정신적 자세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적 자질이 가장 중요하다. 일찍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서 진지하게 물었던 루이스 코저는 《지식인과 사회》(1965)라는 고전적인 저서에서 “오늘날 대학교수를 지식인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들의 시야가 너무나 좁다. 그들은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신랄한 말은 그대로 오늘의 한국 대학사회에 적용하더라도 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지식인이 정직하고 용기있는 발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사회적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지식인 자신이 위엄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한, 그것은 불가피하다.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고자 한다면 그 자유는 실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자유의 실천이야말로 아마도 공자가 말한 인(仁)의 실천이며, 철학자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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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과 자유의실천  (0) 2011/01/25

사고에 붙들려 있는 것은 경영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경험을 나중에 친구에게 말했다.

“참석한 경영자들을 자극하여 창조력을 위한 질주를 하게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나는 다만 참석자 중의 한사람이라도 설령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자신의 아이들이나 손자들을 위해서, 어떤 미래상을 그리는지를 알고 싶었다.” 

성장을 강제하는 ‘돈’

엔데는 공업국의 생산과 소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일종의 성장 강박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독일어에 ‘개가 묻힌 곳’이라는 관용구가 있다. 문제의 핵심이라는 의미이지만, 엔데는 성장에의 강제는 자본주의국가가 공통하게 갖고 있는 ‘돈’의 문제, 즉 돈의 발행, 관리, 운영, 보증 등을 포함하는 금융구조 전체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 돈을 테마로 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에, 나는 화폐의 역사로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합니다. 화폐는 원래 금화나 은화와 같이 그것 자체에 가치가 있었지요.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근대적인 의미의 은행을 거쳐 지폐발행의 역사가 흘러서 오늘날에는 돈은 추상적인 크기에 불과한 것이 되었습니다. 지폐조차도 점점 모습을 감추고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은 컴퓨터의 단위, 완전히 추상적인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문제는 지폐의 발명과 함께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지폐는 물적 가치를 갖고 있지는 않고, 가치의 상징일 뿐이지요. 지폐 발명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지폐가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금괴라면 마음대로 양을 증가시킬 수 없습니다. 금은이 부족한 왕은 군대에 급료를 지불하지 못하고 약소화되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로마제국의 멸망도 이것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금은 모두 페르시아에 지불되고, 페르시아인은 부자들이 되었지만, 로마제국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폐 발명과 함께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지요.

지폐의 가치는 무엇에 의해 담보되는 것인가. 금본위제 시대에는 발행된 지폐는 물질적인 가치를 가진 금과의 관련에서 보증되었다. 그러나 국제통화 달러는 1971년의 닉슨독트린으로 금과의 연계가 단절되고, 달러를 보증하는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시대로 들어갔다. 각국의 통화와 달러가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머니게임의 시대가 된 것이다. 경제학자 베르나르 리에테르는 이러한 상태를 “닻을 잃어버린 달러가 세계를 표류하고 있다”라고 적확히 표현하고 있다.

― 지폐를 발명한 것은 확실히 중국인들이었습니다. 마르코 폴로라고 기억하지만, 인쇄된 지폐를 중국으로부터 베네치아로 가지고 돌아왔고, 그 후 서서히 은행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 중국의 지폐는 마음대로 인쇄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큰 도장이 찍혀진 일종의 증서였어요. 그러나 중국인이 인쇄된 지폐를 발명하였습니다. 그 후 지폐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은행권으로 되었습니다. 이 은행권이라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나는 10명의 법률가에게 편지를 보내서, 법률적 견지에서 은행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적 권리’인가, 국가가 그것을 보증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돈’은 경제영역에 속하지 않고, 법적 단위가 됩니다. ‘법적 권리’라면 상업행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경제영역에 속한다면 그것은 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명의 법률가로부터는 10가지 답변이 왔습니다. 즉 법적으로 보아서 은행권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는 한번도 내려진 적이 없어요. 우리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주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와 만나고, 자료를 수집하는 가운데, 엔데는 스위스의 경제학자 빈스방거에 주목했다. 빈스방거는 무한의 진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근대경제는 중세의 연금술이 성공한 것이라는 특이한 관점을 갖고 있다.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으로 인식하고, 거기에는 근대경제의 매력과 위험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돈과 마술―파우스트와 근대경제》)

《파우스트》의 제4막에서, 악마의 힘을 빌려 청춘을 되찾은 파우스트는 처녀 크레트헨과의 미(美)의 편력을 끝내고, 지금으로 말하면 개발사업에 뛰어든다.

파우스트  지배권과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업이 전부다. 명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메피스토  그럼, 당신의 뜻대로 해보시지요.
파우스트  내 눈은 저 광

1994년 2월 6일,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주도(州都)인 뮌헨의 자택에서 엔데는 두시간 넘게 끝없이 이야기를 했다. 이때 이미 엔데의 육체는 암으로 손상되어가고 있었다. 이듬해 8월에 엔데의 부고를 접했을 때, 우리는 무거운 과제를 떠맡은 느낌이었다. 이 테마를 엔데 없이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엔데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 무렵 냉전 후의 세계에서 사건들이 급격히 일어났다. 1994년 말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통화위기, 97년의 아시아 그리고 러시아의 금융위기, 98년의 세계시장 도박화의 장본인인 헤지펀드의 파탄 등등. 일본도 거품경제 이후 사회 모습이 빗나가고, 관민 모두에게서 도덕적 위반행위가 줄줄이 계속되고 있다. 사회에서는 벌거벗은 생존경쟁논리가 활개를 치고, 실업자와 자살자가 전후 최악의 비율로 증가하고 있다. 바닥 없는 늪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 지방이나 지역공동체에서 자본주의의 폭주에 대항하는 움직임의 싹도 자라고 있다. 지역통화나 ‘사회적 은행’ 등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돈’이라는 병에 걸려있다고 지적한 엔데의 예언은 들어맞고 있다. 1995년 5월, 꽤 시간이 걸렸지만 이 녹화테이프를 토대로 한편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엔데의 유언―근원에서부터 돈을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다.

3차대전은 시작되었다

엔데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미 제3차 세계대전은 시작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것은 영토나 종교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손들을 파멸로 이끄는 시간전쟁”이라는 것이었다.

자손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말을 비유로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지금 우리는 20세기가 산출한 미해결의 문제가 산적한 채로, 21세기로 들어가고 있다. 상징적인 사례는 환경호르몬과 핵폐기물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이것들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것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세에 해결을 미룬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거품 붕괴 후의 경제재건 명목으로 거액의 적자국채가 남발되고, 그 부채상환의 짐은 자손이 지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적으로도, 종교나 민족의 대립이 격화하고 있지만, 그때그때의 대응으로 시종할 뿐, 근원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엔데는 이런 현실을 ‘시간전쟁’이라고 불렀다. 엔데는 누구보다도 일찍이 온갖 문제의 핵심으로서, 자본주의경제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금융시스템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판타지 작가인 엔데는 의표를 찌르는 우화나 이야기의 힘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독자들이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엔데는 말했다.

― 판타지라는 것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동화의 세계에서 공상적인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판타지에 의해서 우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장래에 일어날 일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예언적 능력에 의해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거기서 새로운 기준을 얻습니다.

엔데는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위기에는 대처할 수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위기에는 무력한 존재라고 말한다. 더욱이 엔데는 예전에는 과거의 문화나 역사를 배움으로써 현대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까를 터득했지만,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돈’의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규범이 과거에는 아무것도 없다 ― 따라서 미래를 상정하고,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적으로 직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상상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해결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부터 생각한다. 그것이 엔데가 의지하는 판타지의 힘이다. 우리는 《끝없는 이야기》의 허무나 《모모》의 시간도둑에 대한 상상력이 갖는 설득력을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 다시 엔데의 책을 읽어보면, 그의 ‘돈’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모모》 속에서도 흐르고 있고, 엔데 자신이 온갖 기회에 이 문제를 되풀이해서 말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80년경에 엔데는 취리히에서 열린 재계인사들의 모임에 초대되었다. 200명 정도의 경영자가 모여서 하루 종일 경제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연간 몇퍼센트의 성장이 어떻든 필요하다 따위의 논의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어서, 엔데는 그들 앞에서 《모모》의 한구절을 낭독했다. ‘회색의 남자들’에 관한 대목이었다. 듣기를 끝낸 최고경영자들은 난감한 얼굴로 묵묵히 있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낭독 부분의 문학적 가치에 대하여 토론이 시작되었다. 높은 분들이 아무리 해도 토론이 잘 안되었다. 그래서 엔데는 “여러분은 오늘 미래에 대해서 논의하셨는데, 과감하게 100년 후의 사회가 어떻게 되면 좋을지 자유로이 말해보시라”고 제안했다. 또 오래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어떤 사람이 “그러한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전혀 난센스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사실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곧 적어도 연간 3퍼센트의 성장이 안되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고, 경제적으로 파멸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엔데는 이 회의에 참석한 체험으로부터, 이러한 피상적인 대한 대양으로 향해있다. … 왕과 같은 바다를 해안으로부터 밀어내어, 불모의 넓은 개펄을 메우고, 파도를 바다 멀리 내쫓는 것이다….

― 지폐발행이 무엇을 가져왔을까요? 하나의 예가 빈스방거의 책에 나옵니다. 확실히 러시아의 바이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호반의 사람들은 지폐가 그 지방에 도입되기 전에는 좋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날의 성과에 따라 고기잡이는 달라도 어쨌든 물고기를 잡아서 집이나 이웃 사람들의 식탁에 올렸습니다. 매일 팔 수 있는 만큼의 양을 잡은 것이죠. 그랬는데 지금은 바이칼호에서 이른바 마지막 한마리까지 다 잡아버렸어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어느 날 지폐가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은행의 대부도 이루어졌어요. 어부들은 물론 대부금으로 큰 배를 샀고, 나아가서 효율이 높은 어로기술을 채용하였습니다. 냉동창고가 세워지고, 잡은 물고기는 더 멀리까지 운반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안(對岸)의 어부들도 경쟁적으로 큰 배를 사고, 더 효율 높은 어로기술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빨리, 많이 잡는 데 열심이었어요. 대부금을 이자를 붙여서 상환하기 위해서만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에는 호수에 고기의 씨가 말랐습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고기를 잡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요. 그러나 호수는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물고기가 한마리도 없는 상태가 되어도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근대경제, 그중에서도 화폐경제가 자연자원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엔데는 악마적인 원리에 대해서 말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영성을 부정하고,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물질로 되어있다는 논리를 깔고 있는 원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늘 한편으로는 정신적 존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존재라는 점에서 기인하며, 이 긴장관계가 끊임없는 고뇌를 가져다준다. 고뇌는 인간이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악마는 어떤 시대에도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고뇌 따위는 필요없다. 현세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라”라고 호소한다. 모든 게 물질적인 존재라면 사람에게는 고뇌도 환희도 없을 것이다.

엔데는 경제는 사람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사회적 행위인 이상, 거기에는 선악이나 도덕의 규범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활동은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경제활동의 전제조건이어야 할 자연자원을 파괴하고 마는 경제시스템의 모순에 엔데는 눈을 돌린다.

― 내가 읽은 온갖 경제이론에서는, 원료를 그것이 작업과정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경제적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하에서 잠자고 있는 원유는 아직 경제적 요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대우림은 그것만으로는 아직 경제적 요인이 아닙니다. 벌채되고, 목재로 되어 비로소 경제적 요인이 되는 거지요.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우리는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밭을 황폐하게 만들고, 토양을 불모지로 만드는 농부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자연자원이 자원의 단계에서 이미 경제적 요인이며, 양육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현재 큰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은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서 토지를 파괴하는 저 농부와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4년에 한번은 밭을 쉬게 하고,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연의 수리(水利)를 활용하는 책임감 있는 농부는 경제적으로 불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양심적인 행동이 포상을 받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면 경제적으로 망한다는 게 지금의 경제시스템인 것입니다. 이 경제시스템은 그 자체가 비윤리적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원인은 오늘날의 화폐, 즉 마음대로 증가시킬 수 있는 지폐가 아직도 일이나 물적 가치의 등가물이라고 보는 착각에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빵가게에서 빵을 사기 위한 구입대금으로서의 돈과 주식거래소에서 취급하는 자본으로서의 돈은 두개의 이질적인 돈이라는 인식입니다. 대규모 자본으로서의 돈은 통상 매니저가 관리를 하여 최대 이윤을 올리도록 투자합니다. 그리하여 자본은 증가하고, 성장합니다. 특히 선진국의 자본은 멈출 곳을 모르는 것처럼 계속 증가하며, 그리고 세계의 4/5는 갈수록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장은 무(無)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희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시 한번 화폐를 실제의 노동이나 물적 가치의 등가물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지금의 화폐시스템의 어떤 것을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이 행성에서 앞으로도 생존할 수 있는가 어떤가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 금융시스템을 다시 묻는다

이러한 말은 논리적인 엔데의 발언이기 때문에 각별한 무거움을 지닌다. 통상 우리들 주위에 넘치게 존재하는 경제학이나 경제에 관한 정보 속에서는 현행 금융시스템의 근본을 물어보는 일은 매우 드문 것으로 느껴진다.

― 우리가 언제나 듣는 제안은 시스템 자체는 변경할 수 없고, 그것을 조금 수정하든가, 시스템이 가져오는 결과를 사후적으로 보완한다든가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젠가 한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시스템 자체가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병의 핵심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할 때 항상 부딪치는 게 이 금융시스템입니다.

과거의 고도문명 가운데서 우리들의 화폐시스템과 전혀 다른 화폐를 가지고 있었던 예는 확실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잉카문명에서는 전혀 다른 화폐시스템이 있었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가치척도 위에 성립한 문명이었습니다. 이것이 금융시스템의 변혁을 생각할 때에 직면하는 문제의 하나입니다. 현대인이 물질적인 풍요만이 인생을 가치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 밖의 것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문제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스템의 변혁으로, 여기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하나의 측면은 정신적 변혁으로, 이것은 정말로 필요합니다. 외적인 가치 이외의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쪽이 시스템의 변혁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언젠가 나는 이 문제로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포겔 씨의 개인적 회합에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사회민주당의 경제평의회 멤버로 모시고 싶다. 지금 당신이 한 이야기는 우리들도 알고 있고, 우리들도 생각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자본경제의 변혁을 당 강령으로 채택한다면 큰일이 날 것이다. 아무도, 노동자들도, 사회민주당에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언제나 이성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근시안적인 이익관념이 승리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지중해나 알프스에서의 휴가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누구도 표를 주지 않습니다. 이 경제시스템의 변혁이 어려운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당 강령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를 통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 생각했던 것처럼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나 무력 혁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경제인 자신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 이외의 길은 없습니다. 은행에 거대한 자본이 축적되더라도 자연자원이 파괴된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까요. 경제활동을 하는 경제인이 공동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엔데는 금융시스템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변혁도 당연히 가능하며, 동시에 과거의 여러가지 시도 속에 미래에 대한 힌트가 있다고 주장했다. 엔데는 실비오 게젤의 이름을 들었다. 그의 사상은 돈도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가면 최후에는 사라져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얼핏 진기한 생각인 듯이 보이지만, 이 이론은 실제로 실천되어 큰 성과를 거둔 적이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항했던 경제학자 케인즈도 게젤을 평가한 바가 있다.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에는 “실비오 게젤은 부당하게 오해되고 있다. 우리는 장래의 사람들이 맑스의 사상보다도 게젤의 사상으로부터 한층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 제1차 세계대전 후 레테공화국 시대 바이에른에 실비오 게젤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게젤은 ‘돈은 노화(老化)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테제를 말했습니다. 돈으로 산 것은 감자든 구두든 다 소비됩니다. 감자는 먹어서 소비되고, 구두는 걸어다니는 동안 닳아버립니다. 그러나 그 구입에 사용된 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물건으로서의 돈과 소비물자와의 사이에 부당경쟁이 이루어지는 셈이라고 게젤은 말하는 것입니다. 돈 자체는 물건입니다. 한편으로, 본래 의미에서의 물건은 경제과정 속에서 소비되고, 없어집니다. 그래서 게젤은 돈도 경제과정의 끝에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골수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몸을 순환하고 그 역할을 다한 후에 노화되어 배설되는 것과 같이 말이죠. 돈은 경제라는 유기적 조직을 순환하는 혈액과 같은 것입니다.

이 게젤의 이론을 실천하여 성공한 예가 있습니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 후 오스트리아의 뵈르글이라는 도시에서입니다. 이 시는 부채를 껴안고, 실업자도 많은 상태에 있었어요. 그래서 뵈르글의 시장이었던 운터구겐베르거는 현행 화폐 이외에 노화하는 화폐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간단히 말하면 매월 1퍼센트씩 화폐가치가 감소하도록 고안된 시스템입니다. 뵈르글 시민들은 매월 1퍼센트분의 스탬프를 사서 노화하는 돈에 첨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돈은 가지고 있어도 불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감가(減價)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것을 즉시 사용했습니다. 즉 가두어놓는 게 아니라 경제의 수레바퀴 속에 되돌리는 것입니다. 돈은 소지자가 바뀌면 바뀔수록 구매력이 커지게 됩니다. 하루에 두번 소지자가 바뀌는 마르크는 하루에 한번밖에 소지자가 바뀌지 않는 마르크보다 구매력이 큽니다. 2년 후에 뵈르글에서는 실업자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돈을 빌리더라도 이자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돈을 빌려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시의 부채도 없어졌어요. 그런데 오스트리아 국가가 개입을 해서 이 돈은 금지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비오 게젤 신봉자들이 현행 화폐시스템 속에 2차적으로 도입이 가능한 증거로서 흔히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돈은 시간과 함께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에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지만, 모두가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게젤 이론의 사회적 실천은 1932년 독일 국경에 가까운 뵈르글에서 행해졌다. 당시 인구 5,000명이 채 안되는 이 도시는 400명에 이르는 실업자와 1억3,000만실링의 부채를 껴안고 있었고, 재정은 파탄상태였다. 그래서 시는 긴급구제 계획으로서 통상 화폐와는 다른 ‘노동증명서’라는 새로운 돈을 발행하여 시의 공공사업의 지불에 충당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고용이 생겨나서 실업자는 일자리를 얻고, 경제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저축하지 않고 신속하게 유통되는 돈이 경제활동을 몇배나 크게 한 것이다. 주변 도시들에서도 뵈르글의 성공을 보고, 노화하는 돈의 채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정부는 지폐발행은 국가의 독점적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시장 운터구겐베르거를 국가반역죄로 기소하고, 이 돈을 회수하였다.

무릇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엔데의 사색은 계속되었다.

― 나는 새 작품 〈하메룬의 죽음의 무도〉에서 돈이 마치 신성한 것처럼 숭배되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거기서 누군가가 “돈은 신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확실히 돈에는 신이 지닌 특질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돈은 사람을 결합시키기도 하지만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돈은 돌을 빵으로 변화시킬 수도, 빵을 돌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돈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돈의 증식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게다가 돈에는 불멸이라는 성질까지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공통한 것은 현세의 존재를 피안의 본래 존재에 이르는 일시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종교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은 문화는 없습니다. 오래된 문화도시를 보십시오. 그 중심에는 늘 신전(神殿)이나 사원이나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도시 중심에는 은행 건물이 우뚝 솟아있습니다. 옛날의 영원 관념에서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본래의 존재였습니다. 신전은 그것을 관리했습니다. 즉 현세와 영원의 접속점이었습니다. 돈은 또 영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의 물건이나 재화는 소멸하는 것에 반해서 돈은 불멸입니다. 오늘날의 돈의 영원성과, 그 주제넘음은 본래의 영원성을 서서히 추방하려고 합니다. 배금주의는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요한묵시록〉에는 바빌론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거기서 바빌론은 생물임과 동시에 큰 도시이기도 합니다. 즉 문명입니다. 바빌론은 성서에는 매음행위의 어머니라고 씌어있습니다. 사제는 그것을 성적인 방향으로 해석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매음행위라는 것은 본래 섬겨야 할 것이 매매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애(性愛)라는 것은 강제되거나 매매될 게 아니라 서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바빌론은 매매해서는 안될 것이 매매되고 있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여기서 현대세계를 조망해보면, 우리는 바빌론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예술에서 종교까지 매매의 관점으로 볼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묵시록〉에는 바빌론은 바로 멸망한다고 적혀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망한다고요.

내가 볼 때, 현대의 돈이 가진 본래의 문제는 돈 자체가 상품으로서 매매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등가 대상(代償)이어야 할 돈이 그 자체가 상품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화폐라는 것 속에 화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 들어간 게 아닌가 ― 이것이 핵심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 생각이고, 경제학자는 다른 의견일지 모르지요.

화폐의 기괴한 자기증식은 무언가의 희생을 동반하는 흑마술(黑魔術)이라고 보는 엔데의 새 작품은 독일 중세의 하메룬의 피리 부는 남자에 관한 전설을 현대식으로 읽은 오페라이다.

엔데의 ‘돈’에 관한 문화사·사상사적인 고찰은 계속되었다.

― 역사상 존재해온 국가는 2개의 권력그룹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단(祭壇)과 왕좌(王座)가 그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국가에는 늘 제사계급이 있고, 왕이라는 계급이 있었습니다. 정신세계의 관리자가 사제이고,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귀족계급이 현세의 지배자였습니다. 이 200년간에 종래의 이 두 요소와는 성질이 다른 또하나의 요소가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이 경제생활입니다. 공업화가 시작됨으로써 제3의 권력이 추가된 것이지요. 이 권력은 제단이나 왕좌와는 전혀 다른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매년 3퍼센트의 확대를 전제로 성립하는, 이른바 성장의 강제는 예전의 두 권력그룹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말이 허락된다면, 2항대립 대신에 3항대립으로 생각하는 것에 아직 익숙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엔데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이다. 엔데의 서재에는 몇십권이나 되는 슈타이너 전집이 있고, 그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슈타이너는 사회라는 유기체를 3개의 분절로 나누어서 보는 사회삼층론(社會三層論)을 세웠다. 사회 전체를 정신과 법과 경제라는 세가지의 기능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생활에서는 자유가, 법생활에서는 평등이, 경제에서는 상호부조의 힘이 기본이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능은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이었던 자유, 평등, 우애에 대응한, 근대시민사회의 이상이기도 하다. 이 세가지 영역이 기본원리에 따라 기능하면서 상호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회가 건전한 것이다. 사회삼층론에서는 경제생활을 경쟁이 아니라, 우애라는 원리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있다.

― 인간은 세가지의 서로 다른 사회적 차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국가·법 아래의 생활에 속해있습니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점에서는 경제생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술관도 음악회도 문화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모두가 문화생활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삶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있습니다. 오늘의 정치나 사회가 껴안고 있는 큰 문제는 이 세가지가 뒤섞여버림으로써 서로 다른 차원의 이상(理想)이 혼란스럽게 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사명은 세가지의 이상 전부를 한꺼번에 실현하는 게 아닙니다. 국가는 법률을 만들어 적용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따라서 평등의 이상, 그것도 법 앞에서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국가는 정신이나 경제의 차원에 참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최대 과오는 국가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의 차원에서는 자유의 이상이 무제한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정신은 가능한 한 속박되지 않도록 되어야 하며, 개인 각자에 따라 독자적인 형태로 형성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경제생활의 이상은 우애입니다. 감히 나는 우애야말로 근대경제에 내재되어 있는 공준(公準)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산과 수요의 자유로운 게임을 적용한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되고, 경제적으로 약자가 항상 손해를 보게 됩니다. 경제생활은 본질적으로 사회연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돈은 어떤 차원에 속하는가. 돈이 국가가 보증하는 법적 권리라면 국가에 속한 것으로 매매될 수 없습니다. 또 돈이 경제생활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상품이지만 우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형태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본의 자기증식을 허락하는 금융구조가 우애의 이상을 파괴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엔데의 발언에서 우리는 큰 거리감을 느낄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문화도 경제도 관이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다. 경제재건이라고 하여 사기업인 금융기관에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고 있다. 문화활동이나 정신활동도 권력의 영향에 의해서 방향이 결정되고 있다. 그러나 엔데의 말은 미래사회의 존립방식을 생각하는 데 구체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수결은 정치적 차원의 원리이다. 문화나 정신활동은 민주주의와는 별도의 원리인 자유가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예술은 다수결로 측정되지 않는다. 특히 돈을 생각하는 데에, 경제생활을 관통하는 게 우애의 원리라는 생각은 경청할만하다. 지금 많은 지역통화나 ‘사회적 은행’에서는 사람의 생활을 돕고 상호지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러가지로 추구되고 있다. 거기에서 돈이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끈이 될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경제평론가 우치하시 가츠토(內橋克人)는 ‘다원적 경제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윤추구와 경쟁을 기본원리로 하는 기업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전부를 제공할 수 없으므로 그것과는 별도의, 연대와 협동을 행동원리로 하는 경제적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쟁섹터와 공생섹터가 병존할 수 있는 다원적 경제사회야말로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글로벌리즘이나 규제완화에 의한 자유경쟁이 전부라고 하는 논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인터뷰의 마지막에 엔데는 새로운 사회와 경제의 이상을 내걸었던 맑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맑스의 근본적인 생각은 정의입니다. 이 이념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맑스 시대에는 열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이 일상 다반사였습니다. 탄갱 속에서 매일 일하고 일요일에만 나와서 해를 보게 되는 아이들도 있어서 ‘일요일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시대에 상류계급 사람들은 살롱에서 문화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살롱을 덥혀주는 석탄이 아이들의 혹독한 노동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저 훌륭한 신사숙녀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맑스가 주목한 것은 당시의 그와 같은 사회적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비판한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맑스의 공적으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그의 사상의 문제점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맑스는 개개의 자본가를 국가라는 유일한 자본가에 의해 대체한다면 자본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맑스가 가지고 있었던 헤겔적 세계관에 의한 것일 겁니다. 헤겔은 국가를 신(神)과 같이 우러러보았으니까요. 맑스의 자본론을 읽으면, 거기서 맑스가 일종의 기묘한 환상적인 자세로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세계혁명이 일어난다. 이것은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자연히 일어난다고 맑스는 생각했습니다. 세계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어나고, 거기에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라고 맑스는 쓰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인간이 무계급사회를 건설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려고는 하지 않고, 맑스는 어디까지나 지평선의 일출을 환시(幻視)하듯이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환상일 뿐, 실제로는 새로운 인간은 태어나지 않고, 태어난 것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료주의였습니다.

맑스의 최대 오류는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던 점입니다. 맑스가 하려고 했던 것은 자본주의를 국가에 위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과거 70년간 쌍둥이처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민간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였습니다. 어느 것이든 모두 자본주의이며, 그 밖의 다른 시스템은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엔데는 마지막으로 예언적인 말을 하였다. 낙관적인 게 아니었다.

― 이 시스템의 필연적인 결과를 확실히 볼 수 있게 되기 전에 이성과 이해로써 이 자본주의시스템이 개혁되리라는 환상을 나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상 흔히 그래왔듯이 이성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 경우, 결국 재난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야기한 재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재난은 우리의 자손들이 이 행성 위에서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저주하게 되겠지요. 그건 당연합니다. 내가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손들이 우리들과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문제였던 것들이 점차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근대 자연과학의 문제로부터 사회심리, 종교, 문화, 경제 등, 문제는 모두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나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다른 문제가 부상하여, 모든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곤란하지만, 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이 함락될 때와 같이, 어떤 성벽의 문으로부터 밖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적군이 이미 둘러싸고 있습니다.

돈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당연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돈에 관한 사색은 《모모》에서 시작되었다 

엔데가 사망했을 때, 독일 대통령 로만 헤르초크는 “현재의 독일인으로서 엔데의 책과 함께 성장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했다. 이 말에는 전후 독일의 국민적 작가가 된 엔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넘치고 있다.

1973년에 발표된 엔데의 작품 《모모》는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600만부가 발행되었다. 엔데의 작품은 아동문학이라는 틀을 넘어 폭넓은 연령층의 독자들에게 읽혀왔다.

《모모》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큰 거리의 오래된 원형극장에 한 여자아이가 어딘가로부터 나타나 여기서 살고자 한다. 모모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가만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그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되찾게 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난해도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 어느 날, ‘회색의 남자들’이 나타난다. 시간저축은행으로부터 왔다는 이 회색의 남자들은 실은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뺏아가려는 ‘시간도둑’들이었다. 시간을 절약해서 시간저축은행에 시간을 예치해두면 이자가 이자를 낳아서 인생의 몇십배나 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회색의 남자들의 교묘한 말에 넘어가서 사람들은 여유가 없는 생활에 쫓기게 된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인생의 의미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모모는 도둑맞은 시간을 사람들이 되찾을 수 있도록 예지의 상징인 불가사의한 존재,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회색의 남자들과의 결사적인 싸움에 도전한다.

일해도 일해도 어째서 여유롭게 되지 않는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는 반대로 갈수록 마음속에 퍼지는 공허감…. 엔데의 《모모》는 시간의 진정한 의미, 여유롭게 사는 것의 중요함을 강력하게 호소하여 세계의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엔데 자신은 어떤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 사실은 《모모》에 대해서 칭찬을 하지만, 피상적인 이해밖에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가 칭찬하는 내용은, 내가 《모모》를 통해서 현대사회에서 누구라도 바빠서 ‘시간’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주의를 환기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들의 스트레스 상태, 세상의 경황없이 분주한 상황을 경고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조금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엔데가 《모모》에서 말하고자 한 ‘조금 다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온켄은 《모모》의 우화 이면에 현대의 경제시스템에 대한 엔데의 문제제기가 묘사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그것을 엔데에게 편지로 적어 보낸 최초의 인물이다. 1986년, 엔데의 《모모》를 읽은 온켄은 거기에는 ‘시간과 함께 가치가 감소되는’ 실비오 게젤의 자유화폐이론과 루돌프 슈타이너가 제창한 ‘노화하는 돈’이라는 아이디어가 묘사되어 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경제학자를 위한 《모모》〉라는 논문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엔데 본인에게 서신으로 자기 생각이 바른지 어떤지 물었다. 엔데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친애하는 온켄 씨! 편지와 에세이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책을 이 정도로 잘 이해해주시고, 특히 신비주의와 경제적인 배경에 대해서 이해해주셔서 매우 기쁩니다. 노화하는 돈이라는 개념이 내 책의 배경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바로 이 슈타이너와 게젤의 생각을 이 수년간 나는 집중적으로 학습했습니다. 동시에 돈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들의 문화에 관한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경제학자를 위한 《모모》’

온켄은 《모모》에서 무엇을 읽어냈던가. 온켄의 논문 〈경제학자를 위한 《모모》〉의 일부를 소개한다.

마이스터 호라와 모모, 이 두사람의 대화에는 이론을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경제문제에 관한 심원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 모모는 마이스터 호라에게 “회색의 남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회색 얼굴을 하고 있는가요”라고 묻는다. 마이스터 호라는 대답한다. “죽어있기 때문에, 생명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야. 너도 알 거야. 그들은 인간의 시간을 도둑질해서 살고 있어. 그러나 이 시간은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지면 문자 그대로 죽어버리는 거야. 인간이란 하나하나가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어. 그리고 이 시간은 진실로 자신의 것인 동안에만 살아있는 시간인 거야.” “그럼 회색의 남자는 인간이 아닌가요?” “진짜 인간일 리는 없어.”

회색의 남자들은 부정한 화폐시스템의 수익자에 불과하다. 그 화폐시스템은 본래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 자연계의 밖에 있는 것으로, 화폐를 ‘동결’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만일 시간을 도둑질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원래의 무(無)로 돌아가 소멸되고 말아.”

달리 말하면, 자연에 적합한 화폐시스템이 실현되어 회색의 금리생활자들이 이자를 통해서 인간으로부터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들은 인간존재로서가 아니라 부정한 시스템의 수익자로서 ‘안락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화폐의 권력과, 화폐를 인간의 봉사자가 되게 만든 어린 소녀, 모모에 대해서 쓴 미하엘 엔데의 판타지소설은 완성된 미를 갖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미약한 세력이지만, 사회의 건전화(健全化)를 추구하는 경제학자 그룹에 대해서 문학가의 나라로부터 제공된 이 힘찬 지원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대를 품게 한다. 경제학자 나라의 정신적 경지(耕地)는 판타지에 찬 이 동화를 읽음으로써 서서히 경작되어 자연의 섭리에 맞는 화폐라는 이념이 ‘오늘의 나라’에 있어서도 결국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온켄이 게젤의 이론에 주목한 것은 1980년대였다. 에콜로지운동의 고조 속에서 태어난 녹색당은 게젤의 이론을 연구,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 중심이 되었던 게오르그 오토는 게젤의 화폐이론과 토지제도개혁을 녹색당의 기본노선의 하나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 후 당의 확대와 함께 분열, 오토는 당으로부터 이탈했지만, 이 때문에 다시 한번 게젤의 이론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온켄도 이러한 에콜로지운동의 흐름 속에서 게젤의 이론과 만났다. 당시, 온켄은 교사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게젤 이론을 통해서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고전파 경제학과 맑스주의를 넘은 제3의 길로서 게젤의 이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게젤의 이론은 당시 대학에서도 연구되지 않는 잊혀진 경제사상이었다. 온켄은 흩어져 있던 게젤의 저작을 열심히 모았다. 그것이 10년의 세월을 거쳐서 ‘게젤 전집’이라는 형태로 결실되었다. 1990년대로 들어와서 독일에서는 ‘교환링’이라고 불리우는 지역통화가 시민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온켄은 이러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게젤의 이론이 계승되어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엔데의 작품은 상식이 된 가치관이나 시스템을 계속 묻는 것으로써 새로운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 지금 글로벌화나 시장원리주의라는 이름하에 맹렬한 속도로 사회가 변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도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잃었기 때문에 게젤 이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직면해서 이 사상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앙정치적인 규모에서 변혁을 이루어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소규모의 ‘교환링’ 등 풀뿌리운동을 통해서 사람들의 가치의식을 변혁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최대 과제가 아닐까요.

엔데는 변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어있다. (김형수 옮김)


미국 실업계의 몇몇 거물들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어딘가에 너무나도 교묘하고 용의주도하며 상호연결된, 빈틈없이 잘 조직된 권력이 있기에 그들을 규탄할 때에도 숨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드로 윌슨, 전(前) 미국 대통령

은행이 대출을 할 때마다 새로운 신용이 창조되고, 새로운 예금이 만들어지며, 전혀 새로운 돈이 만들어진다. ― 그레엄 F. 타워프, 캐나다은행 총재(1934―1954)

은행이 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간단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정말 어렵다.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경제학자

한 나라의 통화를 발행하고 통제하는 게 내게 허락된다면, 나는 누가 법률을 만들든 개의치 않겠다. ―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은행가

 

빚으로서의 돈

두개의 큰 신비 ― 사랑과 돈 ― 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이야기, 노래, 책, 영화,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탐구되어왔다. 그러나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화폐이론을 취급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다닌 학교에서조차 돈의 본질에 관한 언급이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돈은 어디서 생기는가?”라는 질문에 곧장 지폐를 인쇄하고 동전을 찍어내는 조폐창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들은 대개 돈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건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우리가 보통 돈이라고 생각하는 금속화폐나 지폐는 실제로 조폐창이라고 하는 연방정부기관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돈은 조폐창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은행이라고 하는 사기업에 의해 매일 막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금자가 맡긴 돈을 은행이 대출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은행은 자신이 번 돈이나 예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상환 서약을 근거로 한 대출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낸다. 대출서류에 표시된 차금인(借金人)의 서명은 대출 원금에 이자를 덧붙인 금액을 나중에 은행에 갚거나, 아니면 집이나 자동차 혹은 담보물로 잡힌 자산을 내놓겠다는 서약이다. 이것은 돈을 빌리는 사람으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부담스러운 약속이다. 그런데 이 서명이 은행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행은 차금인의 계좌에 금액을 써놓는 행위만으로 마술처럼 그 액수의 돈을 생산한다. 터무니없는 일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이 근대적 은행업의 기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금세공사(金細工師) 이야기

오랜 예전에 다양한 물건이 돈으로 사용되었다. 돈은 휴대가 간편해야 했고, 나중에 식량이나 의복, 집처럼 실질가치가 있는 물건과 교환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충분히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조개껍질, 코코아열매, 아름다운 돌, 심지어 깃털도 돈으로 사용되었다. 금이나 은은 부드럽고 가공이 쉽기 때문에 특히 매력적이었다. 그리하여 이 귀금속들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생겨났다.

금세공사는 금속화폐를 주조함으로써 거래를 훨씬 편하게 만들었다. 이 금속화폐는 단위가 표준화되고, 그 무게와 순도가 보증되었다.

자신의 금을 지키기 위해 금세공사는 금고가 필요했다. 그러자 동료 시민들이 찾아와서는 자신들의 금화나 귀중품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금고의 공간을 대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윽고 금세공사는 금고의 모든 선반을 대여해주고 그로 인해 얼마간의 소득을 얻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갔고, 금세공사는 영민한 관찰을 하게 되었다. 즉, 금을 맡긴 사람들이 실제로 금을 되찾기 위해 오는 경우가 별로 없고, 한꺼번에 몰려오는 법도 없었다. 그것은 금세공사가 써준 보관증이 마치 금 자체인 양 장터에서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실업계의 몇몇 거물들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어딘가에 너무나도 교묘하고 용의주도하며 상호연결된, 빈틈없이 잘 조직된 권력이 있기에 그들을 규탄할 때에도 숨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드로 윌슨, 전(前) 미국 대통령

은행이 대출을 할 때마다 새로운 신용이 창조되고, 새로운 예금이 만들어지며, 전혀 새로운 돈이 만들어진다. ― 그레엄 F. 타워프, 캐나다은행 총재(1934―1954)

은행이 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너무나 간단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정말 어렵다.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경제학자

한 나라의 통화를 발행하고 통제하는 게 내게 허락된다면, 나는 누가 법률을 만들든 개의치 않겠다. ―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은행가

 

빚으로서의 돈

두개의 큰 신비 ― 사랑과 돈 ― 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이야기, 노래, 책, 영화,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탐구되어왔다. 그러나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화폐이론을 취급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다닌 학교에서조차 돈의 본질에 관한 언급이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돈은 어디서 생기는가?”라는 질문에 곧장 지폐를 인쇄하고 동전을 찍어내는 조폐창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들은 대개 돈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건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우리가 보통 돈이라고 생각하는 금속화폐나 지폐는 실제로 조폐창이라고 하는 연방정부기관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돈은 조폐창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은행이라고 하는 사기업에 의해 매일 막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금자가 맡긴 돈을 은행이 대출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은행은 자신이 번 돈이나 예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상환 서약을 근거로 한 대출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낸다. 대출서류에 표시된 차금인(借金人)의 서명은 대출 원금에 이자를 덧붙인 금액을 나중에 은행에 갚거나, 아니면 집이나 자동차 혹은 담보물로 잡힌 자산을 내놓겠다는 서약이다. 이것은 돈을 빌리는 사람으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부담스러운 약속이다. 그런데 이 서명이 은행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행은 차금인의 계좌에 금액을 써놓는 행위만으로 마술처럼 그 액수의 돈을 생산한다. 터무니없는 일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이 근대적 은행업의 기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금세공사(金細工師) 이야기

오랜 예전에 다양한 물건이 돈으로 사용되었다. 돈은 휴대가 간편해야 했고, 나중에 식량이나 의복, 집처럼 실질가치가 있는 물건과 교환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충분히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조개껍질, 코코아열매, 아름다운 돌, 심지어 깃털도 돈으로 사용되었다. 금이나 은은 부드럽고 가공이 쉽기 때문에 특히 매력적이었다. 그리하여 이 귀금속들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생겨났다.

금세공사는 금속화폐를 주조함으로써 거래를 훨씬 편하게 만들었다. 이 금속화폐는 단위가 표준화되고, 그 무게와 순도가 보증되었다.

자신의 금을 지키기 위해 금세공사는 금고가 필요했다. 그러자 동료 시민들이 찾아와서는 자신들의

이 종이돈은 무거운 금속화폐보다 훨씬 편리하였고, 거래 때마다 하나하나 힘들여 헤아릴 필요없이 그냥 금액을 써넣기만 하면 되었다.

다른 한편, 금세공사는 또다른 사업을 하였다. 자신의 금을 이자를 붙여서 대출하는 사업이었다. 편리한 보관증이 금 대신 통용되었으므로 금을 대출받는 사람은 실제 금보다도 증서의 형태로 된 대출금을 원하기 시작했다.

산업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금세공사로부터 더 많이 대출받고자 했다. 이렇게 되자 금세공사는 더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었다. 그는 금을 맡겨놓은 사람들이 실제로 금을 되찾아가는 일은 거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금에 추가하여 예금자들의 금을 담보로 해서 보관증을 쉽게 대출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대출금이 상환되는 한, 예금자들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며,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장인(匠人)이라기보다는 은행가가 된 금세공사는 자신의 금만을 빌려줄 때보다 훨씬더 큰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다년간 금세공사는 은밀히 모든 예금자의 금을 토대로 벌어들인 이자로부터 큰돈을 벌었다. 이제 그는 걸출한 은행가가 되어, 동료 시민들보다도 더 부유해졌고, 그것을 과시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그가 예금자들의 돈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금자들은 몰려와서 금세공사가 자신의 재산에 대해 말끔히 해명을 하지 않으면 맡겨놓은 금을 모두 찾아가겠다고 위협했다.

예상과 달리 금세공사에게 이것은 재난이 아니었다. 그의 수법에 내재된 사기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이디어는 잘 기능했다. 예금자들은 잃은 게 아무것도 없었고, 금세공사의 금고에 있는 그들의 금은 안전했다.

금을 되찾아가는 대신에 예금자들은 금세공사가 벌어들이는 이자를 자기들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은행업의 시작이었다.

은행가는 낮은 이자를 예금자에게 지불하고, 높은 이자를 붙여서 대출하였다. 그 차액이 은행의 경비와 이윤을 포괄했다. 이 시스템의 논리는 단순하였고, 그것은 신용에 대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합리적인 방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오늘날과 같은 은행 운영방식이 아니었다. 금세공사―은행가는 자기가 번 이자를 예금자들과 나누고 남은 소득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용에 대한 수요는 유럽이 세계 전역으로 확장되어감에 따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출금은 금고 안에 들어있는 금의 양 때문에 제한되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좀더 대담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자기말고 자신의 금고 안에 실제로 들어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는 금고에 있지도 않은 금에 대한 증서를 발행·대여할 수 있었다! 금 보관증 소지자들이 동시에 몰려들어 금을 찾으러 오지 않는 한,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새로운 수법은 잘 기능했고, 은행가는 존재하지 않는 금에 대해 받은 이자로써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은행가가 무(無)에서 돈을 그냥 만들어낸다는 것은 너무도 믿을 수 없는 기막힌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은행가는 한껏 활용했다.

이윽고 은행가의 막대한 대출금과 주제넘은 부유함에 사람들이 다시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떤 차금인(借金人)들은 예금 보관증서 대신에 진짜 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문이 퍼졌다. 갑자기 몇몇 부유한 예금자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금의 반환을 요구했다. 게임은 끝났다!

예금증서를 소지한 많은 사람들이 홍수처럼 몰려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은행가는 그가 발행한 증서대로 금은을 지급할 만큼 충분한 금은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뱅크런(지불불능상태)’이며, 은행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뱅크런’ 때문에 개별 은행들이 망하기도 하고, 당연히 은행가에 대한 대중의 신뢰에 손상이 끼쳐졌다.

무(無)에서 돈을 만들어내는 관행을 불법화하면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가들이 제공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신용(信用)은 유럽의 상업적 팽창에 필수적인 것이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그 관행은 합법화되고, 다만 일정한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은행가들은 빌려줄 수 있는 허구적인 돈의 양에 제한을 가하는 규제조치를 받아들였다. 제한을 했지만 여전히 대출금은 금고에 있는 실제 금은 가치보다 훨씬 많았다. 흔히 그 비율은 9:1이었다. 정부는 불시점검이라는 방법으로 이 규칙의 준수 여부를 감독하였다.

또한 ‘뱅크런’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금을 긴급히 투입함으로써 지역은행을 지원하는 조치가 마련되었다. 수많은 은행이 동시에 ‘뱅크런’ 사태에 직면할 때에만 은행가들의 신용거품이 터지고, 시스템이 붕괴될 것이었다.

 

오늘의 통화시스템

결국 세월이 흘러서, 부분준비제도와 중앙은행의 지원을 받는 은행들의 통합네트워크가 세계의 지배적 통화시스템이 되었다. 동시에 부채 ― 화폐를 뒷받침하는 금은 점차적으로 제로[零]가 되었다. 그리하여 돈의 본질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지폐는 실제로 금은으로 교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폐나 전자달러는 또다른 지폐나 전자달러와만 교환될 수 있다. 과거에는, 오늘날 우리가 누군가의 개인수표를 거절할 수 있듯이 민간은행이 발행한 지폐를 거부하는 게 가능했다. 지금은, 민간은행이 만든 돈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돈이라고 여기는 달러나 파운드 같은 정부발행 화폐와 합법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만일 정부와 은행, 양쪽이 모두 돈을 창조한다면 얼마나 많은 돈이 존재하는가?

과거에는 돈의 총량은 실제로 존재하는 금속의 총량에 한정돼 있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금화나 은화가 창조되려면 지하에서 새로운 금이나 은을 발견해서 캐내야 했다. 오늘날에는, 돈은 문자 그대로 부채의 형태로 창출된다. 새로운 돈은 누군가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 만들어질 수 있는 돈의 총량에는 단 하나의 제약만이 있다. 즉, 부채의 총액이 돈의 총량이 된다.

정부는 새로운 돈의 창조에 준비예금제도로 알려진 룰을 강제함으로써 법적 한도를 설정한다. 기본적으로 예금준비율은 임의적인 것이며, 나라마다, 시기마다 달라진다. 과거에는, 은행은 금고에 있는 실제의 금 1달러 가치에 대해서 10달러의 돈을 만들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오늘날 예금준비율은 금 보유량에 관계없으며, 새로이 신용창조된 돈은 은행이 기왕에 보유하고 있는 자산 ― 부채―돈 ― 에 따라 비율이 정해진다. 오늘날 은행이 갖고 있는 자산은 정부가 발행한 현금과 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해둔 돈에다가 은행이 갖고 있는 계좌예금의 총액이다.

이것을 간단히 설명해보자. 새로운 은행이 문을 열었다. 아직 예금자가 없다. 그러나 은행이 자본금 중에서 1111.12달러의 현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해놓는다. 은행의 예금준비율은 9:1이다.

제1단계 : 문이 열리고, 새로운 은행이 첫 대출 고객을 맞는다. 고객은 중고차 매입을 위해 1만달러가 필요하다. 새 은행은 9:1의 준비율로 중앙은행에 예치해둔 게 있다. 이것은 ‘하이파워드머니(high―powered money)’라는 것인데, 이것을 근거로 차금인이 서약을 하면 그 예치금의 9배가 되는 1만달러의 돈을 만들어내는 게 합법적으로 인정되어 있다. 이 1만달러는 어디서 가져온 게 아니다. 이 새로운 돈은 단지 돈을 빌리는 사람의 계좌에 기재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그는 중고차를 사기 위해 그 대출금을 근거로 수표에 서명을 하는 것이다.

제2단계 : 중고차 판매상은 이 1만달러를 자신의 은행계좌에 예금한다. 중앙은행에 예치된 ‘하이파워드머니’와는 달리 이 새로이 창조된 돈은 준비율에 의거해서 증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대신에 그것은 그 준비율에 따라 나누어진다. 9:1의 비율로 새로운 대출금 9,000달러가 1만달러 예금을 토대로 창조될 수 있다.

제3단계 : 만일 이 9,000달러가 그 뒤 제3자에 의해 같은 은행에 예금되건, 다른 은행에 예금되건, 그것은 세번째 신용창조의 합법적인 기초가 된다. 이번에는 신용창조가 가능한 금액은 8,100달러이다. 마치 그 안쪽에 계속해서 좀더 작은 인형이 나타나는 저 러시아인형들처럼, 각각의 새로운 예금이 점점 감소하면서 다음 새로운 대출금을 만들어내는 잠재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만일 대출금으로 창조된 돈이 은행에 예금되지 않는다면 그 과정은 멈춘다. 그것은 돈의 창조 메커니즘에서 예견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단계에서 새로운 돈은 은행에 예금될 가능성이 높고, 준비율에 의거한 대출과정이 계속 되풀이되어 거의 10만달러까지 새로운 돈이 창조될 수 있다. 이 새로운 돈은 모두 대출금(부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이 처음에 중앙은행에 1111.12달러를 예치해두는 것으로써 합법적으로 인가된 것이다. 1111.12달러는 전혀 건드려지지 않고 중앙은행에 그대로 남아있다!

더욱이 이 교묘한 시스템 밑에서는 은행의 장부는 그 은행의 대출금보다도 예금액 쪽이 10퍼센트 이상 많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은행이 대출을 하기 위해서 예금을 확보해야 하는 현실적인 유인(誘引)이 되고, 또한 은행대출금이 예금으로부터 나온다는 일반적인, 그러나 잘못된 인상을 조성한다. 그런데 모든 다음 차례의 대출금이 동일한 은행에 예금되지 않는 한, 어느 한 은행이 단독으로 예금의 90배까지 돈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은행시스템은 닫혀진 회로이다. 따라서 한 은행에서 만들어진 대출금은 또다른 은행의 예금이 되어 순환한다. 이론적으로 볼 때, 교환이 균등히 이루어진다면 궁극적인 효과는 마치 모든 과정이 하나의 은행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과 정확히 같아질 것이다. 즉, 최초에 중앙은행에 예치한 1111.12달러라는 돈에 의거하여 은행은 은행 자신이 실제로 갖고 있지 않은 1만달러분의 이자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은행은 자신이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생각된다면, 이것은 어떠한가. 최근 몇십년 동안 은행들의 집요한 로비활동의 결과로 각국의 중앙은행에 예치금을 두어야 한다는 규칙은 몇몇 나라에서 거의 사라져버렸고, 실제 준비율은 9:1보다 훨씬더 높아졌다. 계좌 유형에 따라 20:1 혹은 30:1이 흔한 경우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출수수료를 이용함으로써 은행들은 이제 준비율이라는 제약을 완전히 우회하는 길을 발견하였다.

결국 규칙은 복잡하지만 상식적인 현실은 실제로 매우 간단하다. 은행은 우리가 돈을 빌릴 수 있는 만큼 그 한도까지 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

 

누구라도 잠재의식적으로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의 저금을 인출하고자 할 때, 은행은 그 돈을 누군가에게 빌려줬기 때문에 당신이 인출을 할 수 없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다. ― 마크 맨스필드, 경제학자·저술가

 

끊임없이 조폐창에서 찍어내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만든 돈은 총통화량의 5퍼센트 이하를 차지할 뿐이다. 오늘날 존재하는 돈의 95퍼센트 이상은 누군가가 은행에 부채를 짐으로써 만들어진다. 게다가 이 은행 돈은 새로운 대출이 이루어지고 오래된 대출금이 상환됨에 따라 매일 막대한 양이 만들어지고, 없어진다.

 

나는 보통시민이 은행에 의해 돈이 만들어진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 나라의 신용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정부의 정책을 관장하며, 자신들의 손아귀에 국민의 운명을 쥐고 있다.  ― 레지날드 매케나, 전(前) 영국 미들랜드은행 이사장

 

은행은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이러한 통화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 첫째, 정부는 우리들이 국가통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법률을 통과시킨다. 둘째, 정부는 민간은행의 대출금이 이 정부통화로 지불될 수 있도록 허가한다. 셋째, 법원이 채무이행을 강제한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화폐가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시민들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통화시스템의 원활한 기능과 신뢰성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가지 법규를 통과시킨다.

진실은 간단하다. 즉, 우리가 대출금이나 모기지(저당) 서류에 서명을 할 때, 만일 우리가 빚을 못 갚으면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우리의 서약이 이 거래에 있어서 실질적 가치를 가진 유일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서약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저 대출계약 혹은 저당권은 이제 소지 가능하고, 교환 가능하며, 판매 가능한 종잇조각이 된다. 그것은 차용증서이다.

그것은 가치를 표상하며, 따라서 일종의 돈이다. 이 돈은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이라고 하는 것이 형태를 바꾼 것이다. 오늘날 자연적인 세계에서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빌려준다고 할 때, 반드시 빌려줄 무엇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망치를 원할 때 내가 당신에게 내가 갖고 있지도 않은 망치를 준다는 약속만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이라는 인공적 세계에서는 은행이 자신이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준다고 약속하는 것만으로 그것은 돈으로 통용되고, 우리는 그것을 돈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들의 국가적 통화는 이제 은행의 대출금 거래에 조종되고 있다. 은행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돈을 준다는 약속을 할 뿐이다. ― 어빙 피셔, 경제학자·저술가

 

돈을 빌리는 사람이 서약서에 서명을 하면 은행은 그의 부채를 컴퓨터에 간단히 입력함으로써 거래의 균형을 맞춘다. 차금인(借金人)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그의 계좌에서 ‘대출금’이 되며, 이 은행부채―돈은 정부에 의해 법정통화와 교환이 가능하도록 보증되었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되풀이하지만, 기본적인 사실은 너무나 단순하다. 돈을 빌리는 사람의 서명이 들어있는 서류가 없으면 은행가는 빌려줄 게 아무것도 없다.

정부, 기업, 소기업, 가정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저토록 천문학적인 부채를 지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일찍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떻게 빌려줄 수 있는 돈이 저렇게 많은지 여러분은 일찍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이제 여러분이 알게 됐듯이, 그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냥 부채를 발행함으로써 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부채는 잠재적으로 무한정한 것이기 때문에, 돈의 공급도 무한정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풍부한 자원, 기술혁신,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정부, 회사, 개인을 막론하고 은행가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고 있다!

사람들은 멈춰 서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실제로 세계의 진정한 부를 모두 생산하고 있는 사람들이 단지 부를 표상할 뿐인 돈을 빌려주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게다가, 그 돈이란 게 ‘부채’라는 사실, 그리하여 부채가 없으면 돈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그것은 더 경악할 일이다.

 

우리의 통화시스템은, 부채가 없을 때 어떠한 돈도 없는 그러한 시스템이다. ― 마리너 S. 에클스, 전(前)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만일 이러한 얘기가 당신에게 새로운 뉴스라면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빚을 청산하면 경제상태가 개선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대출받은 돈을 다 갚았을 때 우리에게는 쓸 돈이 더 많아지듯이, 모든 사람이 빚에서 벗어나면 일반적으로 쓸 돈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이다. 그렇게 되면 전혀 돈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돈이 존재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은행신용이 창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완전히 그러한 메커니즘에 의존해있다.

대출금이 없으면, 돈도 없다. ― 이것이 대공황 때 일어났던 사태이다. 대출금이 고갈됨에 따라 화폐공급도 극적으로 위축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상업적 은행들에 의존해있다. 누군가가 돈을 빌리지 않으면, 현금이든 신용이든 돈이 순환하지 않는다. 은행들이 풍부한 돈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번영을 누리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굶주린다. 우리가 상황 전체에 대한 그림을 파악할 때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가 갖는 비극적 어리석음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 로버트 H. 헴필,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신용국장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은행은 오직 원금만을 만들어낸다. 은행은 사람들이 지불해야 할 이자는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자는 어디에서 마련될 수 있는가?

신용차금인(借金人)이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돈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일반경제의 흐름 속이다. 그러나 거기에 공급된 화폐의 거의 모두는 바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돈이다. 즉, 원금에다가 이자를 붙여서 갚기로 되어있는 은행신용으로 만들어진 돈이다.

따라서 도처에서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차금인(借金人)들이 오직 원금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총통화량에서 저마다 이자가 붙은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한 돈을 획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금에 이자를 붙여 빚을 상환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자에 해당하는 돈은 원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는 모기지(저당)나 정부부채와 같은 장기 대출금의 경우에 이자의 총액은 원금을 훨씬 상회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자 지불을 위해 충분한 돈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담보물 상실(foreclosure) 비율이 매우 높아지고 경제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사회의 원활한 기능 유지를 위해서 담보물 상실 비율을 낮출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더욱더 많은 새로운 돈(=빚)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이렇게 하면 부채의 총액은 더 커진다. 그러면 더 많은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 되며, 그 결과, 갈수록 가속화하는 나선형적인 부채 증가가 불가피하게 된다.

돈이 새로운 빚의 형태로 만들어질 때와 그것을 갚을 때 사이의 ‘시간간격’ 때문에 전체적인 화폐부족에 의한 시스템 자체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은행가의 만족을 모르는 신용창조라는 괴물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괴물을 먹이기 위한 돈을 만들어낼 필요는 갈수록 긴박해진다.

오늘날 금리가 저렇게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우리가 신청하지도 않은 신용카드가 우편으로 자꾸 부쳐져 오는가? 미국정부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출을 빨리 집행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게 하면 전체 화폐시스템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가?

이성적인 사람은 물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영구히 계속될 수 있는가? 붕괴는 필연적인 게 아닌가?

 

우리의 부분준비제 은행시스템에 관련하여 한가지 깨달아야 할 것은 아이들의 의자찾기놀이에서처럼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패배자는 아직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앤드류 고즈, 화폐사가(史家)

 

돈은 생산과 거래를 촉진한다

화폐공급이 증가함에 따라 실제 세계에서의 생산과 거래량이 같은 규모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돈은 갈수록 가치가 떨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가 연 3퍼센트 성장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은 일정한 비율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금년의 3퍼센트는 작년의 실제 총 재화와 서비스를 기준으로 다시 3퍼센트 성장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3퍼센트 성장이라는 말에서 자연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직선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은 점점더 가파르게 치솟는 기하급수적 곡선을 그린다.

문제는 실체경제의 영구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실제 세계의 자원과 에너지 사용이 영구적으로 가속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라도 매년 갈수록 많은 자연자원이 쓰레기로 변해야 하고, 이 상황이 영구히 계속돼야 하는 것이다.

 

기하급수적 성장이 유한한 세계에서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광인이거나 경제학자일 것이다. ― 케네스 보울딩, 경제학자

 

이 두렵기 짝이 없는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돈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새로워져야 한다. 이제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정부에 대하여 4개의 단순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세계 전역에서 정부는 민간은행으로부터 이자가 붙은 돈을 빌리고 있다. 정부부채는 총부채의 주요부분을 이루고 있고, 그 부채를 갚는 데에 우리들의 세금이 막대하게 사용된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은행이 어떻게 돈을 만들어내는가를 알았고, 정부가 이것을 허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째 질문. 어째서 정부는 자신이 필요한 돈을 이자 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데도 민간은행으로부터 이자 붙은 돈을 빌리고 있는가?

두번째 질문. 왜 돈을 빚의 형태로 만들어내야 하는가? 항구적으로 순환하며, 이자가 붙은 돈을 끊임없이 빌리고, 다시 빌리고 할 필요가 없는 돈을 어째서 만들지 못하는가?

세번째 질문. 계속해서 가속적인 성장을 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는 화폐시스템으로써 어떻게 지속가능한 경제를 건설하겠는가? 계속적인 기하급수적 성장과 지속가능성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마지막 질문. 총체적으로 영구적인 성장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통화시스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속가능한 경제의 창조를 위해서 무엇을 바꿀 필요가 있는가?

 

이자놀이

한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이자놀이(usury)라고 하였고, 그것은 엄한 처벌 ― 심지어 사형 ― 을 받았다. 모든 주요 종교는 이자놀이를 금지하였다. 이자놀이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논리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돈의 유일한 정당한 목적은 실제의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돈으로 돈을 증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 기생적인 행위 혹은 도둑질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상업의 발달에 의한 신용거래의 필요가 증가함에 따라, 도덕적 논리는 약화되고, 대금업(貸金業)은 위험과 기회손실을 수반하는 행위이므로 대금에 따른 이익을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가 우세해졌다.

오늘날 옛사람들의 생각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돈에서 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당연히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미래를 모색하는 노력에 있어서 이자는 도덕적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문제이다. 에너지원이라는 자본을 약탈하지 않고, 오직 현재의 소득만으로 살기 때문에 여러 세기를 지탱할 수 있는 사회와 경제를 상상해보자. 같은 기간 동안에 자라는 나무 이상으로는 벌목을 하지 않고, 모든 에너지는 재생가능한 에너지이다. 이 사회에서는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모두 재사용 내지 재순환시킨다. 인구도 정상(定常)상태를 유지한다. 그러한 사회는 영구적인 가속 성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화폐시스템으로써는 기능할 수 없다. 안정된 경제는 적어도 붕괴되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화폐공급을 필요로 한다.

자, 한번 상상을 해보자. 몇몇 사람이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 일을 체계적으로 하기 시작한다면, 화폐공급에서 그들의 비중은 커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계속적으로, 상환되는 모든 돈에 이자를 붙여 다시 대출을 한다면 그 필연적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게 금이건 법정화폐이건 부채―돈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금업자는 결국 모든 돈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당잡힌 담보물에 대한 차압이 이루어지면 그들은 실물재산까지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 핵심적인 문제는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 일이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고르게 분배된다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은행이익에 대하여 중과세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은행은 무엇 때문에 사업을 하려고 하겠는가?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은행업이 사회에 대한 비영리적 서비스사업으로 운영되어, 자신의 이자수입을 보편적 시민배당금으로 분배하거나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거나 하는 시스템으로 변해야 할 것이다.

 

화폐제도의 변혁

시스템의 근본적 성격이 문제의 원인이 된다면 땜질 처방으로는 문제해결을 할 수가 없다. 그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화폐제도 개혁가들은 금본위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은 오랜 세월 동안 신뢰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금을 이용한 많은 속임수를 간과하고 있다. 금을 깎아내거나 순도를 저하시키거나 매점 행위를 하는 등등, 이러한 것은 고대 로마에서 흔한 관행이었고, 결국 로마 멸망에 기여하였다.

어떤 이들은 금보다 양이 풍부하고, 따라서 매점이 어렵다는 이유로 은을 추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귀금속을 다시 불러들여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쇼핑을 위해서 무거운 금속화폐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금이 또다시 화폐의 유일한 합법적 토대가 된다면, 금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갑자기 한푼도 없게 된다!

또다른 화폐개혁 제창자들은 탐욕과 부정직함이 주된 문제이며, 따라서 금은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정직하고 공평한 화폐제도를 만드는 더 나은 길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사실, 창의적인 정신들은 돈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대안적 방법을 제안해왔다. 많은 민간 교환시스템들은 은행처럼 부채로서의 돈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투명하게, 그리고 이자를 부과함이 없이 행해진다. 그 한 예는 노동시간을 서약하는 것으로써 부채가 표현되는 교환시스템이다. 모든 일은 동등하게 달러가치로 표시되어, 노동에 들인 시간이 재화의 달러가격과 일치하게 되어있다. 이런 종류의 화폐시스템은 회계방식을 설계할 수 있고, 자발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참가자들만 발견할 수 있다면 누구든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지역교환 화폐시스템은 현재로서는 아직 널리 쓰이고 있지 않지만 어떤 공동체이건 훌륭한 긴급 구제 대책으로 사용될 수 있다.

화폐제도 개혁은 선거제도 개혁처럼 중대한 문제이며, 변혁에의 의지와 상투적인 틀을 벗어나 사고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화폐제도 개혁은, 선거제도 개혁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 시스템을 통해서 이익을 취하고 있는 막강한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힘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돈이란 단지 하나의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았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무엇이든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매우 단순한 대안적 화폐개념이 있다. 이 모델은 과거에 영국과 미국에서 실제로 잘 기능하고 있었지만, 금세공사―은행가들과 부분준비제도 때문에 파괴된 시스템에 토대를 둔 것이다.

항구적이고, 이자 없는 돈에 기초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돈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바람직스럽기는, 그 돈은 도로, 철도, 교량, 항만, 공설시장 등 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내구성을 가진 하부구조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 돈은 부채로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돈의 사용처 ― 그게 무엇이든 ― 그 자체가 가진 가치로서 창조될 것이다.

이 새로운 돈이 필요에 따른 거래량 증가에 기여한다면, 그것은 인플레를 발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정부지출이 인플레를 유발한다면, 두가지 조치가 가능하다. 인플레는 사실상 돈에 세금을 부과한 것과 같은 것이다. 돈의 가치가 20퍼센트 하락하건, 정부가 우리들한테서 우리의 돈 20퍼센트를 가져가건, 우리의 구매력에 미치는 효과는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세금이 아닌 인플레는 한도만 지켜진다면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아니면, 정부는 세금을 받아 그 돈을 사용하지 않고 화폐공급량을 줄여 화폐가치를 복원함으로써 인플레에 대항할 수 있다.

임금과 물가의 하락 현상인 디플레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그냥 더 많은 돈을 유통시키기만 하면 될 것이다.

부채의 형태로 돈을 만들어내는 민간은행과 경쟁하지 않는다면, 정부는 국가의 화폐공급을 좀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태가 잘못되면 누가 잘못했는지 책임소재가 분명해질 것이다. 화폐가치를 보존하는 정부의 능력에는 부침이 있을 것이다. 정부는 지금처럼 일차적으로 세금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하겠지만, 그러나 세금은 민간은행에 이자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훨씬더 많이 확보되고, 그 혜택은 멀리까지 미칠 것이다.

연방정부가 자신이 필요한 돈을 그냥 스스로 만들기만 하면 국가부채란 있을 수 없다. 정부부채에 대해 은행에 이자를 지불함으로써 우리가 집단적으로 영구히 은행의 노예가 되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화폐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이다. 화폐가 오래된 노예제와 다른 점은 그것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 즉 주인과 노예 사이에 아무런 인간적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 톨스토이

 

보이지 않는 힘

자신이 자유롭다고 잘못 믿고 있는 사람보다도 더 노예는 없다. ― 괴테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라고 믿어온 것은, 실제로는, 교묘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형태의 경제적 독재체제이다. 우리의 사회 전체가 통화공급 때문에 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해있는 한, 은행가들은 누가 돈을 가지거나,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현대의 은행제도는 무(無)에서 돈을 제조해낸다. 이 과정은 일찍이 발명된 그 어떤 것보다도 놀라운 천재적인 기술이다. 은행업은 부정직한 마음속에서 구상되었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 은행가들은 지구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지구를 빼앗고, 그 대신 돈을 만들어내는 힘을 그대로 맡겨놓는다면, 잠깐 사이에 그들은 지구를 도로 차지할 만큼 충분한 돈을 만들어낼 것이다. … 그들에게서 돈을 만들어내는 권력을 박탈해야 한다. 그러면 훨씬더 살기 좋고 행복한 세계가 될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노예로 살기를 원한다면 은행가들이 계속해서 돈을 만들어내고, 신용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라. ― 조시아 스탬프 경(卿), 잉글랜드은행 총재(1928―1941)(당대 영국에서 제2의 갑부로 알려졌었다)

식민지인들이 조지 3세와 국제은행가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신들의 돈을 발행할 항구적인 힘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 아메리카혁명전쟁의 주된 이유였다. ― 벤자민 프랭클린

 

1776년의 혁명 이래 미합중국의 역사는 주로 유럽 국제은행가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서사시적 투쟁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투쟁은 1913년에 패배로 종결되었다. 그해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법에 서명을 함으로써 국제 은행카르텔이 미국의 통화를 지배하도록 허용하였던 것이다.

 

나는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하나다. 나는 부지중에 내 나라를 망쳤다. 한 위대한 산업국가가 자신의 신용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우리의 신용제도는 집중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국가의 성장과 우리의 모든 활동은 몇몇 소수인의 손에 장악돼 있다. 우리는 문명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지배되고, 가장 완전히 통제되는 정부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더이상 자유로운 의견에 의한 정부도, 다수의 의견과 투표에 의한 정부도 아니라, 소그룹의 지배자의 의견과 강박에 의해 움직이는 정부가 되었다. ―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1913―1921)

 

이 시스템은 깊이 뿌리박혔다. 이 문제에 대해 학교도 언론도 침묵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러해 전에, 캐나다의 부총리가 비공식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가들과 일반시민들을 상대로 조사를 했고, 그 결과 그들 가운데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였다. 실제로, 은행의 일선 실무자까지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잠시라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아메라카의 모든 혼란, 분규, 고통은 헌법이나 연방제의 결함, 혹은 명예심이나 덕성의 결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와 신용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 기인하고 있다.  ― 존 애덤스, 미국헌법 기초자

 

부채로서의 돈이라는 근대 화폐제도는 지금부터 300년 전쯤, 영국 국왕의 허가를 받아 2:1의 준비율로 금에 대한 수령증을 빌려주면서 잉글랜드은행이 창설되었을 때 탄생했다. 그 조그마한 비율이 악몽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 시스템은 온 세계를 지배하면서 무(無)에서 사실상 무한정한 돈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결과,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절대로 청산할 수 없는, 끊임없이 커가고 있는 빚의 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우연히 일어난 사태인가? 아니면 음모에 의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큰 문제가 여기에 걸려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통화량을 통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든 산업과 상업의 절대적인 주인이 된다. … 이 전체 시스템이 꼭대기의 소수 권력자에 의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손쉽게 통제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여러분은 인플레와 불황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제임스 A. 가필드, 암살된 미국 대통령

정부가 지출해야 할 돈과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통화와 신용을 정부 자신이 만들고, 발행하고, 유통시켜야 한다. 이 원칙의 채택에 의해 납세자들은 막대한 액수의 이자를 지불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돈을 만들고 발행하는 특권은 정부의 최고 특권일 뿐만 아니라, 정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창조적 기회이다.  ―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된 미국 대통령

통화와 신용(크레디트)의 발행권리가 정부에 돌려지고, 그것이 정부의 가장 뚜렷하고 신성한 책임으로서 인정되기 전에는, 의회주권이나 민주주의에 관한 온갖 논의는 공허한 잡담에 불과하다. … 국가가 자신의 신용제도를 통제할 권리를 잃는다면 누가 법률을 만드는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대금업자들이 득세하면 어떤 나라든 파멸한다.  ― 월리엄 라이언 매켄지, 캐나다은행 국유화를 단행한 캐나다 총리

우리는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타임〉 및 기타 위대한 간행물들에 감사한다. 그 간행물들의 책임자들은 거의 40년 동안 우리의 회합에 참석하였고, 신중하게 행동하겠다는 약속을 존중해왔다. 우리들이 저 기간 동안에 대중에게 노출되었더라면 세계를 위한 우리의 계획을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세계정부를 향한 행진을 하는 데 보다 세련되고, 잘 준비가 되어있다. 초국가적인 지적(知的) 엘리트와 국제은행가의 주권은 과거 세기에 행해졌던 국가적 자기결정 방식보다 더 바람직스러운 것이 확실하다.  ― 데이비드 록펠러, 1991년 삼극위원회에서의 연설

보호가 필요한 것은 오직 소소한 비밀들이다. 엄청난 비밀은 대중이 믿지 않기 때문에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  ― 마셜 맥루헌, 미디어 ‘구루’